[Music from S] 모든 음악가들에게 바치며, 영화 '디베르티멘토'

본 리뷰에 사용된 영화 '디베르티멘토'의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제작사 France 2 Cinéma/Estello Films/Easy Tiger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영화'임을 밝힙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기억이 좋았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만이 하루의 유일한 일과였기 때문에. 티켓을 발권하고 입장할 때, 그리고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보고 퇴장할 때 달라진 마음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그 기억으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았다. 지금은 낡고 병든 몸과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면서 행복을 느끼던 순간들이 흐릿해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음악과 함께 하던 즐거움은 좇으면 좇을수록 다른 이의 음악을 듣고 좌절하는 일로, 혹은 부러워하다 마음을 곪아 터지게 만들었고,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더 절규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 분명 맞다. 가장 무너졌을 때 가장 큰 힘을 쥐어짤 수 있던 오늘을 보면 사실이 맞다. 이것은 사실을 넘어 진실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내가 만난 영화 <디베르티멘토>를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열일곱 살 쌍둥이 자매 자히아와 페투마에게 클래식 교향곡은 삶의 전부나 다름없다. 쌍둥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첼리스트라는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파리 교외에 사는 이민자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앞길을 자꾸만 가로막는다. 결국 자히아와 페투마는 ‘디베르티멘토’라는 오케스트라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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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탱과 파리

자히아와 페투마가 사는 스탱은 파리에서 북쪽으로 11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스탱은 여러 면에서 파리와는 현저히 다른 수치들을 갖고 있다. 실업률도 훨씬 높고, 생활 수준에서도 차이가 있다. 자히아는 스탱과 파리를 오가며 음악 활동을 이어간다. 그리고 스탱에서 함께 음악 하는 동료, 파리에서의 동료들을 섞어 한데 모으기까지 한다. 자히아는 스탱의 학생, 파리의 학생, 그보다 더 어린 학생, 프로 연주자, 선생님, 장애인까지 오케스트라로 모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다른 소리들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에서 자히아는 공공의 영역에서 도움을 끌어오기까지 한다. 자히아가 시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시장을 설득하는 과정을 두고 변영주 감독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최고의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것을 예술가가 해내야 한다. 도모하고 실현하는 것까지. 평등이란 개념을 음악에 담을 수 있도록.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게서도 살아있는 캐릭터성이 느껴졌던 장면들에는 감독의 섬세함이 담겨 있었다. 각기 다른 호흡으로 담아내던 섬세한 장면들은 영화의 제목처럼 ‘디베르티멘토’[2]적이었다.

음악은 생물이다

영화가 흐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자히아의 멘토 ‘세르주’가 건넨 이야기가 가슴에서 계속 맴돈다. 세르주는 음악은 살아있는 생물이라 말하며 그는 자발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도 이전의 기억이 뒤따라왔다.

‘음악을 하고 있다’는 말을 곱씹어 보면, 그 말은 마치 음악이 옆에 서 있는 사람처럼 존재하고 내가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내 음악이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맘껏 흘러갈 수 있게 길을 터주고 응원하며 그를 도와야겠다고 했던 결심까지 떠올랐다. 잊고 지냈다. 지금의 나는 음악은 철저히 통제가 가능한 재료일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발성을 잃고 싸늘하게 식어있는 음악을 음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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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말해왔다. 예술은 마치 신내림과도 같다는 친구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덧붙인다. 누구는 살만해서 음악 한다지만 실은 내가 살기 위해서였음을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기 위해 음악을 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살아있는 음악을 해야겠다. 나의 음악이 자발성을 갖고 흘러갈 수 있도록 그를 도울 것이다.

내가 만난 자히아

음악은 언제부터 흐르고 있었을까? 나는 이 영화에서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단순히 선율이, 리듬이 튀어나오는 순간부터가 아니었다. 자히아가 지휘에 앞서 시계를 푸는 행위에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호흡을 고르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멈춘 것 같던 그때부터 음악은 시작되었다.

자히아의 몰입은 일상의 소리와도 밀접하게 닿아있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소리들과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곡이 하나가 되는 장면들은 자히아가 사라지고 그의 음악만이 남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하나가 될 때 새로운 음악이 태어났다.

승승장구하던 자히아의 걸음에 제동이 걸리고 그는 무기력해진다. 생기 넘치던 눈빛도 꺼져버리고 벽을 보며 누워있던 자히아의 뒷모습은 소리 없이 절망하던 나를 닮았다 느꼈다. “나는 매일 두려움과 싸운다”는 자히아의 대사는 마치 내 일기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결코 해내지 못할 거야”라 외치는 자히아의 음성에 그림자 하나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누워 바라보던 벽에는 지휘하는 자히아의 손이 두둥실 떠오른다. 뒤이어 어디선가 스네어 소리가 들려오고 자히아는 홀린 듯이 소리를 따라간다.

집 밖에서는 영화의 시작이 되어주었던 라벨의 볼레로가 시작하려는 듯이 발을 구르고 있었다. 자히아가, 영화가 갖고 있던 에너지가 0으로 떨어졌을 때 이제껏 보여주었던 것과는 철저히 다른 크기의 에너지가 맞붙어 나온다. 악보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으나 본질은 담겨있지 않다는 말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엔딩 장면을 통해 그 본질이 무엇인지 맛볼 수 있었다.

단원들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추며 지휘가 가진 초월성을 있는 힘껏 펼쳐내던 그 순간, 자히아만의 음악적 표현이 탄생하던 바로 그 순간에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어서 스크린에는 한 줄의 글이 걸린다. ‘내가 만났던 모든 음악가들에게’

그 문장은 ‘모든 음악가들에게’로 다가오며 나를 울렸다. 나는 멈추지 않는 눈물과 고맙다는 말로 영화에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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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나를 만들고 나는 음악을 만들고

음악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사람은 바꿀 수 있다는데, 내 음악은 단 한 사람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것 같아 초라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단 한 사람이라도 뜨겁게 꿈틀거리는 내 음악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움직이길 바랬을 뿐인데.

과연 없었을까? 내게 그런 단 한 사람이?

가장 움직일 수 없었던 나를 내 음악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의 음악이 얼어붙어 있던 나를 걷게 하고 달리게 만들었다. 내가 만들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 음악이 좋아서 사랑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진심은 여기에 있다, 눈을 감으면, 낙원, 숲, 아주 긴 꿈, 공무도하가, 어깨, 도망자, 달리는 마음, 산다는 것은 어느 한쪽을 편든다는 것…

음악이 실로 사랑스럽다. 마음을 움직이고, 이끌고, 나를 꿈꾸게 만드는 음악과 오늘도 내일도 같이 걷고 싶다. 해왔던 대로 꾸준하고도 치열하게.

[1] 출처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시놉시스

[2]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 희유곡)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에서 특히 유행된 다악장의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