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ntide SP2016, H949를 활용한 단편선 순간들 '아내' 커버 작업기

안녕하세요, Eventide의 SP2016과 H949 Harmonizer를 리뷰하게 된 박래현이라고 합니다. 단편선 순간들의 싱글 <아내>의 커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두 제품을 써보았으며, 어떤 의도로 어떻게 사용했는지 공유드리는 방식으로 리뷰를 진행하겠습니다.

이 리뷰는 Plugin Boutique로부터 Eventide SP2016H949 Harmonizer의 NFR(Not For Resale) 라이선스를 제공받아 작성됐습니다. (본문 내 링크에는 제휴 코드가 없으며 광고성 기사가 아님을 밝힙니다.)

저는 영상작가이자 사운드 엔지니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공인 미술을 기반으로 다른 영역의 예술을 제 방식대로 해석해 이해하고 적용해 왔습니다. 본질적으로 영상은 시청각을 모두 활용한다면 음악은 청각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제게 음악은 화면이 없는 영화와 다름없었고, 믹스를 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화를 편집하는 일이었습니다. 소스를 의도에 맞게 정리해 주어진 시간 동안 관객 혹은 청자를 그 세계관으로 초대하는 일은 영상과 음악 모두 다르지 않았습니다.

SP2016 Digital Reverb

Eventide라는 회사를 처음 알게 된 제품은 현재 H9 Plug-in Series 중 하나이자 Immersive 버전까지 나온 Blackhole Reverb였습니다. 2012년에 처음 발매된 이 플러그인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특유의 긴 시간과 여러 모듈레이션을 통해 현존하지 않는 공간을 연출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아직 리버브를 어떻게 제대로 쓰는지도 모르던 때에 특이하고 멋지다 생각해 덜컥 구입했던 제품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 리버브는 양, 질감, 길이, 종류 등을 고려해 소리를 그리고자 하는 공간 안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이펙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초기 반사음의 길이와 그것이 감쇄되는 양을 조절한다면 그 소리가 울리는 공간을 정의할 수 있었고, 알고리즘 혹은 컨볼루션 방식에 따라 재질감까지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여러 리버브 플러그인을 수집하는 데에 빠져있었습니다. 목소리부터 악기, 효과음까지 어떤 소리든 상상하는 곳에 놓을 수 있다는 점은 촬영장을 자유롭게 바꾸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eventide 1 sp2016

SP2016은 1982년에 출시되었던 하드웨어 디지털 리버브 프로세서입니다. 리버브의 발전을 간략히 훑어보자면 1930년대 커다란 방에서 스피커로 재생한 소리의 반사음을 다시 녹음하는 형태인 Echo Chamber에서 시작해 50년대에는 Spring, 60년대에는 Plate의 울림을 활용하는 리버브가 나왔고, 1976년 최초의 디지털 리버브인 EMT250가 등장했습니다. 그간 실제 울림을 직접 받아왔다면 이때부터 수학적 연산을 통해 잔향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90년대 후반, 실제 공간의 반사 패턴을 이용하는 Impulse Response, 즉 Convolution 리버브까지 나오면서 발전을 이어갔고, 지금에 와서는 소리의 역할을 고려해 리버브마다의 특성을 질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상을 주로 작업해 오던 저는 유려하고 입자감이 느껴지지 않는, 마치 실제 공간에서 들리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리버브를 제일 좋은 리버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Liquidsonics의 Seventh Heaven Professional은 그런 제게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디지털 리버브 중 빼놓을 수 없는 제품인 Bricasti M7을 복각했고, Fusion IR 기술로 알고리즘과 IR리버브의 장점을 한데 모은 덕에 무겁지 않게 작동하면서 유려한 공간감을 아주 손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가 선명한 공간에 있으리란 법은 없었습니다. 장르와 연출에 따라 카메라를 바꿔서 입체적으로 작품을 그려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필름이나 빈티지 디지털카메라의 질감이 필요한 순간에 저는 풀프레임 미러리스 카메라만 들고 있던 격이었습니다.

eventide 2 sp2016
사진=Eventide
eventide 3 sp2016

SP2016에는 초기 디지털 리버브의 입자감이 있습니다. Program 버튼을 누르면 Vintage와 Modern 두 종류 안에 Stereo Room, Room, 그리고 Plate 각 3개씩 총 6개의 알고리즘이 들어있습니다. 이들은 실제 하드웨어에서는 플러그인 할 수 있는 모듈형 칩이였으며, 당시 하드웨어 기기에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가능성을 제시한 혁신적인 설계였다고 합니다.

높은 해상도를 원한다면 당연하게도 Modern 중에서 골라야 했습니다. Vintage는 공교롭게도 영상편집 시 사용하던 필름 시뮬레이션 플러그인을 떠올리게 했는데, Modern이 35mm 필름이라면 Vintage는 Super8mm 필름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빈티지 디지털 리버브 사운드의 질감을 가져가되 해상도까지 챙기고 싶다면 Modern을, 기기의 특징을 온전히 옮기고 싶다면 Vintage를 사용하면 좋을 거로 생각듭니다.

eventide 4 sp2016

Parameters에는 여타 리버브 플러그인처럼 Mix, Pre-delay, Decay, Diffusion이 있었고, 그중 유독 Position Control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페이더 중 하나로 들어있어서 하드웨어에도 있던 기능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Pre-delay와 Reverb Time 그리고 Decay의 길이를 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위치에 따라 고역주파수를 줄여 거리감이 느껴지게끔 만들었습니다. 매뉴얼 상으로는 Early와 Late Reflection의 비율을 조정한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Chamber 리버브 플러그인에서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H949 Harmonizer

eventide 5 h949.png

Eventide의 Harmonizer 계열 제품은 Pitch Shifting과 Delay, 그리고 Modulation을 복합적으로 활용해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75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 이펙트 프로세서인 H910 Harmonizer가 출시되었고, 후속작인 H949는 세계 최초의 디글리치(de-glitched) 기능이 들어가 피치 시프팅 시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H949 Harmonizer는 항상 궁금했지만 제겐 경험할 기회가 없던 종류의 이펙터였습니다. Soundtoys의 Microshift가 Eventide의 H3000, H910 같은 하드웨어의 Pitch Shifting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관심을 가졌지만, 이왕 구매한다면 원조인 Eventide의 제품을 경험해 보고 싶어 항상 구매 순위에서 밀렸습니다.

eventide 6 h949
사진=Eventide
eventide 7 h949

SP2016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리버브 제품들을 간간히 본 적이 있어서 금방 익힐 수 있었지만, H949는 하드웨어를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디자인 자체도 매우 생소했습니다. Bypass 즉 Power Off를 누르면 기계가 꺼지듯 숫자가 서서히 없어지는 것까지 구현할 정도로 재현에 진심이었습니다. Delay Only Output과 Main Output의 Delay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데 6.25, 12.5, 25, 50, 100, 200의 버튼으로만 구성된 것을 보고 처음에는 200ms가 최대인 걸로 착각했습니다. 원하는 시간만큼 조합해 버튼을 눌러 시간을 정하면 최대 400ms까지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은 직접 소리를 들어보며 유추할 수는 있었겠지만, 매뉴얼을 읽지 않았다면 제대로 기능을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eventide 8 h949

H949의 사운드를 만드는 가장 주된 버튼은 Function Select라고 생각합니다. 버튼이 눌린 상태(IN)는 PC(Pitch Change)모드를, 눌리지 않은 상태(OUT)는 Delay, Random, Flange, Reverse를 토글 할 수 있게 해주며, 각각 빨간색과 초록색 글씨와 그림으로 이를 구별해놓기도 했습니다. Shift라는 글자를 찾다가 PC가 Pitch Change의 약자인 것 또한 매뉴얼을 읽고 알 수 있었습니다. Micro 기호인 μ가 그려진 PC에는 ♯과 ♭이 있는데, 각각 시프팅하는 사운드를 샾이나 플랫으로 올리거나 내리도록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추가로 Algorithm Select 버튼으로 De-glitch 사운드를 쓸지 안 쓸지를 결정할 수 있었는데 이 또한 PC 사용 시 질감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단편선 순간들 '아내' 커버 작업

단편선 순간들의 <아내>는 처연하고도 격동적인 곡이었습니다. 삶과 사랑에 관한 권태로움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려는 인물의 태도에는 기묘한 희망이 있습니다. 리드미컬한 드럼은 꾸준히 나아가겠다는 인물의 발걸음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커버를 기획한 친구와 함께 편곡 아이디어를 나누며 정한 방향은 곡의 극적인 면을 더 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곡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내레이션은 인물이 노래가 아닌 대사로 상황과 감정을 정확히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원곡자인 단편선은 노래하는 화자와 이야기를 하는 화자를 분리했습니다. 노래하는 화자인 단편선의 내레이션은 이야기하는 화자인 김해원의 내레이션 뒤에 열화되어 들립니다. 저는 이 구간의 공간을 확실히 나누어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비가 오는 아침이었어.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바람에 너풀거리는 커튼."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해변으로 쓸려와 숨을 거두기 직전의 고래와 증발이 얼마 남지 않은 수증기였다."

인물은 오래전에 만났던 상대와의 재회를 이야기합니다. 과거를 떠올리며 인물은 그 순간으로 들어가는 듯 보입니다. 쉼 없이 내린 이슬비로 안개가 낀 습한 바닷가, 채도가 낮고 색이 바랜 필름으로 이를 찍은 장면이 그려졌습니다. 드럼은 이와 같은 본격적인 회상에 들어가기 전의 전조 장치가 되길 바랐습니다. 탐 사운드를 킥과 스네어로 사용했는데, 컨볼루션 리버브는 과한 현실감을 주었습니다. SP2016의 Vintage - Stereo Room이 주는 거친 입자감은 필름과 테이프 시절의 빈티지한 공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eventide 9 sp2016

"사라지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서 엉엉 울었다. 없는 팔과 없는 다리를 휘감고 우리는 엉엉 울었다."

인물의 입장에서 이 말을 내뱉는 순간이 가장 격정적일 것입니다. 고조를 위해 반복되는 말렛 소리로 마치 빗방울이 빠르게 떨어지거나, 지진에 의해 흔들리는 물체를 떠올리길 원했습니다. 앞서 말한 드럼처럼 내레이션 보컬 역시 완벽한 실제 공간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SP2016 Modern - Plate의 사운드를 100% 활용하기엔 너무 특징적이라 느꼈습니다. 마치 과거 회상 장면을 강한 세피아 톤으로 잡는 클리셰가 될 것 같아 우려되었고, 다른 리버브와 Send Level을 섞어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공간감과 미세한 입자감으로 내레이션 공간을 디자인했습니다.

"새파란 빛이 곤히 잠든 너의 손끝을 비춘다. 하얗게 빛나는 손. 가만히 손을 뻗어 너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다짐한다. 막막함을 삼킨다."

서서히 인물은 회상에서 자신의 다짐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회상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그곳에 서 있는 인물 또한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H949는 이 연출을 위한 최고의 이펙터였습니다. Pitch Change Normal, Main Output 25ms을 토글한 뒤, Mix값을 조절해 서서히 딜레이된 사운드와 원래 사운드를 섞어 공기 중으로 인물이 흩어지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새파란 빛에 내레이션 인물이 동화되어 사라지고 다시 노래하는 화자로 돌아옵니다. Juno와 Moog bass, 허밍, 그리고 관악기의 조화를 통해 인물의 다짐으로 나아가며 마무리합니다.

eventide 10 sp2016 h949
eventide 11 h949

SP2016은 디지털 리버브의 특징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모드를 선택해 이를 장르와 특색에 맞게 활용하기에 좋았습니다. 제게는 강한 특징을 가져 전천후가 될 수는 없지만, 필요할 때 감초 같은 역할을 잘 해내는 배우같은 리버브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H949 Harmonizer가 무궁무진한 역할을 해낼 거로 예상합니다. 기본적인 Pitch Shift 연출뿐만 아니라 함께 제공되는 Dual Harmonizer를 사용한다면 스테레오로 좌우 사운드를 각각 달리 조정할 수 있는 Stereo Delay 플러그인이 됩니다. Preset 리스트는 이펙터를 이해하는 아주 좋은 교과서가 될 테니 꼭 둘러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두 플러그인을 함께 사용한다면 창의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스테이플러(Stapler)라는 도구를 호치키스(Hotchkiss)라는 상표 이름으로도 널리 부르는 것처럼, Pitch Shifting을 활용하는 이펙터를 Harmonizer라고 부르는 것은 Eventide의 오리지널리티 덕분입니다. 유명한 하드웨어를 플러그인으로, 그것도 직접 그 회사가 복각한 플러그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앞으로 이 플러그인들로 만들어 낼 사운드의 가능성이 기대됩니다.





뮤지션을 위한 노하우 모음 KNOW-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