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영화가 오늘 음악과 만났을 때

무성영화극장 2024 : 수진,유태성 & 로버트 플라어티 <북극의 나누크>
2024년 1월 24일 오후 7시 piknic

로버트 플라어티의 '북극의 나누크'(1922)는 극장에서 상영된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24일에는 100년도 더 된 이 영화를 2024년 오늘날 뮤지션의 실연과 함께 상영하는 자리가 있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무성영화지만 영화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무성영화를 상영하면서 실시간으로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었다. 현재 리마스터된 북극의 나누크에는 1922년 오리지널 스코어를 기반으로 미국의 지휘자 티모시 브룩과 올림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버전이 녹음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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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북극의 나누크' 촬영 모습. (출처=퀘벡 시네마테크, Public Domain)

24일 있었던 <무성영화극장 2024 : 로버트 플라어티 '북극의 나누크'>에서는 싱어송라이터 수진이 영상에 맞춰 앰비언트 음악을 시도했다. 앰비언트에는 특유의 무겁고 느린 사운드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오케스트라 편성은 전통적으로 '범용적'이다. 영화에는 이누이트인들의 삶이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려진다. 티모시 브룩의 오케스트라 녹음 버전도 영화의 장면에 따라 직관적인 감정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북극의 나누크에 앰비언트 장르를 시도하는 것은 단순히 영화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만드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100년의 간격을 두고 만난 영상이라는 '이미지'와 지금 실연되는 오늘날의 '사운드'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순간에는 아티스트의 의도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만약 아티스트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음악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낸다. '어떤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원작에 다른 의도와 변형이 반영된다면 말이다.

1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음악이 영상을 철저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상 앞에서 꿋꿋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본 이 영화는 어땠냐면...'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영상은 음악에 순응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음악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배경음악'에 불과하다. 공연을 기획한 피크닉에서 '로버트 플라어티 <북극의 나누크> & 싱어송라이터 수진, 재즈 기타리스트 유태성'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영상과 음악이 동등한 위치에서 협업하는 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만약 연주자의 무대가 스크린 앞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들었다. 사실, 눈 앞에 펼쳐지는 100년 전 고전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했다. 이미지에는 시공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술적' 힘이 있는 반면, 사운드는 본질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는 운동 에너지가 아니던가.

이번 시도는 필연적인 대립이었고 결과 역시 새로웠다. 만약 영상을 잘 보조하고 100% 어울리는 직관적인 사운드로 가득했다면 오히려 실망스럽지 않았을까. 앞서 '어색함'에 대해 말했지만, 생각해 보면 1922년 영화의 음악을 지금 시대에, 지금의 장비로, 지금의 시대상과 가치관 속에서 다시 만드는 것이 더 어색할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잘 만들어지고 좋은 공연을 봤을 때보다, 갈등하고 대립하는 공연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관객이 문화를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소비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박찬울(월간 믹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