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from S] 네 발 밑에 있잖아 바보야

“정훈희 노래 대부분 다 좋아해.”

40년이 넘는 아빠와 나의 나이 차이를 무색게 하는 것은 음악 취향이다. 장필순의 '어느새'를 불러 링크를 공유해 드렸을 때는 눈물이 찔끔 났다는 먹먹한 한 마디가 돌아왔다.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시간들에 저항하려면 노래 속에 추억을 차곡차곡 저장해두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뜻도 모르고 좋아하던 노래가 유독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에 등장했다. 나중에 꼭 불러보리라 다짐했던 순간이 순식간에 밀물처럼 내 마음을 채워 버렸다.

헤어질 결심을 기점으로 박찬욱 감독님에 대한 애정이 한 차원 깊어졌다. 그분의 인터뷰를 허겁지겁 읽어 치우던 중 마음에 와닿는 인터뷰 하나를 만났다. 그가 후배들에게 덜어야 할 것과 더해야 할 것에 대해 조언하는 내용이었다.

"나를 꿈꾸게 만들었던 기준 앞에서 포기하지 말 것, 집요하게 완성도를 높일 것. 그러나, 아집과 고집은 버릴 것."

단순히 노래 부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나는, 그날 이후로 세심히 조각하듯 노래를 불러본다. 누군가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알지 않는가! 하는 마음으로 손길을 더하고 더하며.

이번 ‘안개’ 커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내가 주로 사용했던 악기는 피아노인데, 기타로 연주된 최근 버전의 ‘안개’를 피아노로 옮겨오자니 어딘가 빈 느낌도 나고, 더 비장해지기만 해서 군데군데 내가 좋아하는 코드 진행들로 흔적을 남겨 보았다. 평소에 노래를 듣다가도 반음씩 하강하는 진행을 만나면 소름 끼치게 좋아하는 나라서 이번에도 역시 참을 수 없었다.

서래의 원피스가 파란색인지 초록색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모호한 안개처럼 이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다. 기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지는 목소리를 상상하며 불렀다. 한 음 한 음 부를수록, 희뿌연 연기가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믿으며 안개처럼 불렀다.


바닷가에서 헤매는 해준의 모습은 정서경 작가님의 말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닌 자기 안에서 자기 일부를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보인다. 바로 발밑에 있는 나를 찾지도 못하고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나의 야성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장면이 자꾸 내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살아있다는 마음을 느낄 일이 좀처럼 없는 내게, 어디에서나 나는 없고 나의 역할만 남아있어 나를 찾아 헤매는 나에게, ‘네 발 밑에 있잖아 바보야’라고 말하며.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나는 어디에 있을까? 역시 내 발밑에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고민할 때의 나는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다.

깨달은 그 순간, 푹 잠길 수 있었다.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감쪽같이 사라졌던 서래처럼 나의 야성을 발견한 내가 이 노래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